남대문, 정확히는 숭례문이라 해야 할 것 같습니다만.
이 문이 처음 만들어진 것은 태조 5년(1396)으로, 이제 만들어진 지 612년이 되는 건축물입니다. 한성의 4대문 중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에게 가장 잘 알려진 사실은 숭례문이 우리나라 국보 1호라는 점인데,
이런 국보의 지정은 일제시대 때 보물 목록과 동일하기도 하거니와, 숭례문이 과연 우리나라를 대표할 수 있느냐는 문제로 곧잘 논란이 되고 있습니다만.
숭례문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중요한 가치를 가진 문이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조선시대 때에는 통금이 있었고, 밤이 되면 사대문을 닫아 왕래를 엄금했습니다. 또한 이 문은 조선의 의례에서 중요하게 활용되었습니다.
전쟁이 벌어졌을 때 출병하는 군사를 배웅하는 것도, 중국으로 가는 사신을 배웅하는 것도 숭례문이었지요.
왕이나 왕대비가 죽었을 때 숭례문을 통해서 나갔고,
왕이 서울을 떠났다가 돌아올 때 신하와 백성들이 맞이하는 곳도,
중국에서 온 조서를 받는 곳도 숭례문이었습니다.
젊었을 적 열혈이었던 왕 영조는 직접 숭례문에 가서 대역죄인들을 문초하거나, 처형을 결정하기도 했지요. 정조도 이 문을 통해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역으로 향했습니다.
그리고 이 숭례문은 임진왜란, 병자호란 와중에도 불타지 않아, 고려말의 건축 양식을 고스란히 전하고 있었던 희귀한 건축물이었습니다.
다만 일제시대 때 전차를 설치하면서 남대문은 심하게 훼손되었습니다. 좌우의 성벽을 잃고, 문 하나만 무인도처럼 덜렁 남아버렸지요.
가장 심각한 손상을 입었던 것은 1950년 6. 25 전쟁 와중이었습니다.
총상이나 폭격으로 입은 손상이 심각했던 것입니다. 이후 국군에 의해 서울이 수복된 뒤 숭례문은 급히 복원이 되었는데, 아무래도 서울의 상징을 되살린다는 의의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전쟁 와중에 진행되어서인지 상당히 졸속으로 진행되었습니다.
수리는 51년에 계획하고, 52년에 착수하되 53년에 후딱 완공하는 식으로 끝났습니다. 그런데 자세한 보고서가 작성되기는 커녕, 누가 수리에 참여했는지 조차 제대로 기록에 남지 않은 졸속 복원이었고, 내내 문제가 되었지요.
이를테면 불과 4년 만에 처마가 내려앉았는데, 나무 사이에 구멍을 뚫어 연결하는 방식이 아니라 못으로 대충 박아놓고 끝난 것이 원인으로 밝혀졌습니다. 그 외에도 단청 등에서 잘못된 복원이 있었는데, 이는 나중에 대대적으로 수정되었으니, 이것이 60년대의 일입니다.
1961년부터 약 3년여에 걸쳐, 숭례문은 대대적인 중수작업을 거치게 되었습니다. 이 작업은 그 당시 최첨단 기술과 인력이 동원되었던 것은 물론, 원칙을 준수하며 복원이라는 목적에 충실했다는 점에서 역사학상 그 유례가 없을 정도로 잘 된 복원이었습니다.
수리, 특히 문화재의 복원은 모든 것을 화려하고 으리으리하게 바꾸는 것이 아니라, 원래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남긴 채 오래 이어질 수 있도록 보존처리를 하는 것입니다.
62년의 복원 작업은 바로 여기에 충실했습니다. 복원 및 보존처리를 하되, 숭례문에 원래 쓰여진 목재 중에서 깨지거나 썩은 부분을 제외하고 남은 전부를 재사용했고 그 외의 재료들도 큰 문제가 없는 한 원래의 것을 썼습니다.
설령 부패한 부분이 있더라도 튼튼히 보강해서 썼고, 왕찌나 기둥 역시 보존된 게 있으면 보강해서 최대한 다시 썼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목재를 쓸 때에는 "남" 화인을 찍어두어 원래의 목재와 구분이 가게 했다고 합니다.
또 글씨가 쓰여진 특별한 사례와 도리 등은 귀중한 문화재로 숭례문의 상층과 주층에 보관되어 있었습니다. 요즘도 복원 작업 중에 옛 목재들의 자세한 조사 없이 그대로 버리고, 기존보다 더 화려하고 좋은 것으로 바꾸는 일이 허다하다는 것을 감안하면 당시의 숭례문 복원은 정말 선진적인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오랜 시간의 작업 끝에 1962년 12월 27일 남대문은 상량식을 가지고, 63년 5월 14일 준공식을 거쳐서 지금에까지 이르렀습니다.
이후 40년간 남대문은 비가 새거나 진동(지하철)으로 인한 박락 정도만이 문제가 되어 이 당시의 복원 작업의 뛰어남을 입증해주고 있습니다.
이 때의 복원 작업은 남대문을 보존하는 것 외에도, 이제까지 알려지지 못했던 사실들을 밝혀내기도 했습니다. 학자들은 숭례문 복원과정에서 원래 숭례문이 팔작지붕의 건물이었다는 사실을 밝혀내거나, 조선후기에 수리하면서 새로이 첨가된 장식들을 구분해내기도 했습니다. 여기에 참여한 학자분들 이름을 다 적을 순 없겠지만, 정인국, 신영훈, 김정수, 홍붕의, 황수영 교수님 등이 있네요.
이렇게 밝혀진 것 중 가장 유명한 것은 숭례문 상량문입니다. 숭례문이 처음 태조 5년에 만들어져서, 세종 때 고치고 성종 때 또 고쳐왔던 사건과 내역들이 모두 상량에 모두 쓰여져 있었던 것입니다. 매번 고칠 때 마다, 고친 날짜와 그 사연들을 자세히 적어놓았던 것이지요.
또 하나 재미있는 것은 추녀의 사례에서는 남대문 제작에 참여했던 목수들의 이름 정서방, 등이 쓰여져 있었던 게 발견되었습니다.
이렇게 묵서가 들어간 목재들은 특별히 목재 자체는 신품으로 교체한 뒤, 남대문의 주층과 상층에서 따로 보존 중이었습니다만. 다만 이번 화재로 이 묵서가 들어간 목재들이 무사할 리가 없을 듯 하네요.
무사하려니 믿고 싶지만 믿을 수 없고요.
...글을 쓰고 있던 와중 숭례문이 전소했다는 보도를 들었습니다.
임진왜란을 버텨냈고, 병자호란을 지나 6.25에도 남아있었던 건축물이
이렇게 사라졌습니다.
지난 낙산사 화재 이후 이런 기분은 오래간만이네요.
소방본부 분들 수고하셨습니다.
늦은 밤, 몇 시간 동안이나 밤잠 못 주무시고 정말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그런데 나쁜 건 문화재청이 아니라, 불입니다.
문화재나 박물관에 화재가 발생했을 때,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큰 손상은 화재 자체 보다 불을 끌 때 쓰는 화학제제에 의한 물리적, 화학적 피해로 인해 벌어집니다. 더군다나 남대문은 600년 역사를 가진 문화재이자, 우리나라 문화재 복원사의 증거이기도 합니다. 그 문이 홀라당 불타기를 바란 사람은 문화재청에 일하는 사람 중 아무도 없을 겁니다.
저는 전문가가 아니라서 복원 문제에 대해서는 자신할 수 없습니다만.
62년에 제작된 숭례문의 실측도가 남아있기는 할테니 복원은... 가능할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울고 싶습니다.
지켜야 할 것을 또 하나 잃었습니다.
참고문헌
이강근, 「숭례문연구 : 수리사와 복원의 의의」, 『강좌 미술사』, 2002
김정기, 「서울 남대문 지붕의 변천」, 『미술사학연구』, 1965
김정기, 신영훈, 「남대문통신」1-완, 『미술사학연구』, 1963
최용완, 「남대문 해체후 발견된 묵서」, 『미술사학연구』, 19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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